제목경쟁심의 굴레2022-01-28 03:00
작성자 Level 10

자녀를 처음 학교에 보낼 때 부모들은 아이가 학교에서 얼마나 공부를 잘 할 것인지 염려와 기대가 공존한 가운데 학교에 보낸다. 한국에서 초등학교에 처음 아이를 보내면서도 그랬고 이 곳에 와서 낯선 언어를 사용하는 새로운 학교에 아이를 보내면서도 마찬가지 감정을 가진다. 차차 적응이 되어 아이가 80점을 받아 오면 이제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드디어 100점을 받은 날 아이는 날아갈 듯한 발걸음으로 현관문을 연다. (아이) “엄마, 나 오늘 100점 받았어요.” (엄마) “그래? 잘했구나. 그런데 100점 받은 아이들이 몇 명이니?” (아이) “10명쯤 돼요.” 이렇게 대답하는 아이에게서 환한 얼굴이 사라진다. 아이뿐 아니라 엄마에게서도 웃음이 사라진다.

왜 우리는 아이가 잘 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저 잘 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보다” 잘 해야 안심이 되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경쟁 사회 속에 살아왔다는 증거일 것이다. 꼭 100점이 아니더라도 우리 아이 점수를 아는 것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고 옆 집 아이가 몇 점을 받았는지 알아야 하고, 그 아이보다 우리 아이 점수가 높지 않으면 편안한 마음을 갖지 못하는 부모들이 많다. 자녀가 성적표를 받아 올 때마다 더 열심히 하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1등을 하는 아이에게도 똑 같은 말을 하는 것은 1등 자리를 남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하물며 성적이 중간 이하인 아이들이 “성적이 이래 가지고야 대학에 갈 수나 있겠냐?” “너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앞으로 사회에서 살아 남지 못해!” 등의 말을 듣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자녀의 교육에 관심이 많다는 부모들의 관심이란 대부분 성적과 관련된 것이고, 그것도 석차라는 극히 제한된 측면에 국한된 경우가 많다. 이처럼 우리 아이들은 한국에서나 캐나다에서나 성적과 석차에 대한 압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끊임없이 경쟁심을 부추기는 분위기 속에서 자란다. 남보다 더 잘 하기 위해, 혹은 남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가르치고 배우며 교육의 목적은 남에게 손해보지 않고 사는 법을 가르치는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더불어 잘 사는 사회”라는 말은 구호에 불과한 비현실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이 곳 캐나다 밴쿠버 지역에 와서 자녀를 양육하며 사는 가정들 중에는 가족 전체가 이민을 온 가정도 있고 기러기 가족으로 지내는 가정도 있다. 어떤 가정이든지 태평양을 건너는 쉽지 않은 결정을 하게 된 배경에는 자녀들을 더 좋은 교육환경에서 양육하고자 하는 부모의 바램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더 좋은 교육환경이란 어떤 환경을 말하는 것일까? 아름다운 자연이나 맑은 공기를 말하는 것일까? 최신화된 교육시설을 말하는 것일까?

사실 교육 시설로 말하면, 한국 만한 곳이 없다고 할 수도 있다. 반듯하고 깨끗하고 예쁘게 지어진 학교 건물들은 캐나다보다는 한국에 더 많다. 처음 이 곳에 와서 아이들을 데리고 학교에 가 본 부모들 중에는 많은 학교에 가건물이 설치되어 있고 그 속에서 아이들이 공부하는 것을 보고 놀라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뿐 아니다. 한 반에 두 학년의 아이들을 섞어 놓은 경우도 적지 않다. 교실에 에어컨은커녕 작은 이동식 소형 선풍기 하나로 반 전체가 견뎌야 하는 학교도 얼마든지 있다. 도대체 캐나다가 더 좋은 교육환경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곳에서 공부하면 일찍부터 영어를 습득하기 때문에 자녀가 국제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인재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일까?

필자는 이 곳 캐나다에 와서 이 곳 교육의 여러 면들을 보면서 더 나은 교육환경이란 외적인 자연환경이나 좋은 시설이나 영어라는 언어 환경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아이들로 하여금 인간답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주는 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프리 스쿨에 아이를 보냈던 어떤 중국인 엄마에게서 들은 이야기이다. 어느 날 자기 아이 반에 volunteer를 하러 가서 보니 아이들에게 아기를 어떻게 돌보아 주어야 하는지, 왜 아기를 돌보아 주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고 한다. 중국도 우리처럼 어린 나이부터 지식 위주, 경쟁 위주의 교육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을 보고 이런 교육이 더 중요한 교육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을 했다. 초등학교에서는 장애자들의 불편을 공감하도록 하기 위해 한 시간 동안 눈을 가리고 공부하게 하거나 말을 하지 않고 의사소통을 하는 경험을 하게 하기도 하고 wheel chair를 타고 시장에 다녀오도록 하는 경험 등을 하게 함으로써 장애자들의 어려움을 스스로 경험해 보게 하는 것을 보았다.

이런 교육은 중등교육에서도 계속된다. 한국에서는 미켈란젤로에 대해 공부할 때 그가 남긴 작품의 제목들을 외우면서 그가 얼마나 천재적인 소질을 가진 사람이었는가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반해 여기서는 그가 그런 위대한 작품을 남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는가를 앎으로써 그 가치를 인정해주는 교육을 한다. 그래서 실제로 책상 밑 쪽에 도화지를 붙이고 거꾸로 누워 몇 시간이면 끝낼 수 있는 간단한 그림이나마 (미켈란젤로는 시스틴 성당의 천정화를 완성하는 메 무려 4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리면서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이었는가를 체험하게 한다. 이런 교육을 통해 다른 사람의 수고를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 보는 훈련을 한다.

이런 교육은 당장 시험을 치는 데는 그렇게 유용하지가 않다. 남보다 낫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각 사람의 인격과 수고를 존중해주고 이웃과 사회를 돌볼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게 하는 데는 큰 기여를 한다. 경쟁이 교육의 존재 목적인 것처럼 되어 있는 교육이 아니라 바로 이런 교육이 이루어지는 교육현장이 더 좋은 교육현장임이 틀림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 자신도 경쟁심의 굴레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오늘 저녁에 친구들이 연주하는 음악발표회에 다녀와도 되겠느냐고 묻는 딸에게 그 음악회가 자신에게 도움을 줄 만한 수준인지, 거기에 다녀오려면 가는 시간 오는 시간 합쳐서 적어도 4 시간은 소모되는데 학기말이 가까운 지금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학업에 도움도 되지 않는 일에 사용해도 되는지를 묻지 말고, 가서 친구들을 격려하고 발표회를 가지게 된 것을 축하해주고 오라고 허락해 주어야겠다.

 

(박진경 / Family Alive 연구소장,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교수)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일 4:11).